요즘 많은 사람이 무언가를 배웁니다. AI가 다 한다는 말이 사방에서 들리고, 가만히 있으면 뒤처질 것 같아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렇게 배운 건 잘 안 남습니다.
강의를 결제하고, 새 도구를 깔고, 며칠 열심히 해보다가 흐지부지됩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또 다른 걸 배웁니다. 계속 배우는데 계속 불안합니다. 이 사이클을 몇 번 돌고 나면 지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는 게 무섭고, 뒤처질 것 같아서 뭐라도 붙잡아야 할 것 같은데, 막상 붙잡으면 이걸 왜 하는지 모르겠는 상태. 그 조급함으로 하는 공부는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려움이 시키는 일은, 내 일이 아닙니다
답은 단순합니다. 그 공부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킨 사람이 있습니다. 두려움입니다. 뒤처질까 봐, 대체될까 봐, 남들은 다 하는 것 같아서. 그 목소리가 시켜서 시작한 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남의 일입니다. 시키는 게 누군가가 아니라 내 불안이라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시켜서 하는 일에는 몰입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원래 그렇게 생긴 겁니다. 아무리 좋은 도구를 쥐여줘도, 그걸로 이루고 싶은 게 내 것이 아니면 손이 안 갑니다. 딱 해야 하는 만큼만 하고 멈춥니다.
그러니 "의지가 부족했나" 하고 자책할 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붙을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이건 그냥 비효율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한 겹 더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두려움에 떠밀려 나를 계속 업그레이드하려는 태도에는 숨은 전제가 있습니다. 내가 쓸모 있어야 살아남는다는 것. 그래서 나를 더 쓸모 있게 만들고, 더 뽑아내고, 안 되면 더 갈아 넣습니다.
이건 나를 사람이 아니라 자원으로 다루는 방식입니다.
자원으로 따지면 인간만큼 효율 나쁜 자원도 없습니다. 쉬어야 하고, 아프고, 감정이 있고, 이유 없이 하기 싫은 날도 있습니다. 그런 존재를 자원의 잣대로 계속 몰아붙이면 결국 고장 납니다. 우리는 그걸 번아웃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방식이 낯익지 않으신가요.
불안하니까 더 뽑아내고, 더 쓰고, 돌아볼 여유 없이 소모하고, 고갈되면 다른 데서 또 가져오는 것. 우리가 세상을 대해온 방식이 정확히 이겁니다. 자연을 자원으로 보고, 갈아 넣고, 고갈시키는 그 방식.
두 개가 닮은 게 아닙니다. 같은 논리입니다.
나를 대하는 방식이, 곧 세상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나를 자원으로 다루는 사람이 세상을 다르게 대할 리 없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건 개인의 마음 관리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게 될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제가 그 길로 가지 않겠다고 하는 건 그래서입니다. 나 하나 편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나를 갈아 넣지 않는 방식으로 사는 것과, 세상을 갈아 넣지 않는 방식으로 사는 것은 같은 선택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
반대쪽에서 시작하면 됩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내 욕구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게 뭐지?"라는 질문은 한가한 질문처럼 들리지만, 사실 여기가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에는 시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몰입이 붙습니다.
몰입해서 하는 학습은 주입식으로 배우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누가 시켜서 외운 건 며칠이면 흐려지지만, 내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들려고 알아낸 건 몸에 남습니다. 속도도 비교가 안 됩니다. 필요해서 찾은 것이라 붙는 자리가 다르니까요.
아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이는 놀이를 배우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하게 배웁니다. 어른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 욕구에서 나온 일은 웬만한 게임보다 재밌고, 재밌으니까 계속하게 되고, 계속하니까 늡니다.
이게 제가 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시간을 죽이는 오락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일. 그리고 그런 일은 나를 소모시키지 않고 키웁니다. 같은 '성장'이라는 말을 쓰지만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하나는 뽑아내는 성장이고, 하나는 자라는 성장입니다.
AI는 여기서 마법 지팡이가 됩니다
그동안 "하고 싶은 걸 하라"는 말이 공허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만들 수가 없었으니까요. 능력이 부족해서,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상상은 대부분 상상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AI는 상상을 현실로 꺼내주는 도구입니다.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내던 걸 만들어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같은 도구가 두 방향으로 갈립니다. 두려움 쪽에 서면 AI는 나를 더 쥐어짜야 할 이유가 되고, 욕구 쪽에 서면 AI는 내 상상을 꺼내주는 지팡이가 됩니다. 도구는 같은데 서 있는 자리가 다릅니다.
그리고 후자를 택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재밌어서 했을 뿐인데 실력이 늘어 있습니다. 따로 "AI 공부"를 하지 않아도, 만들고 싶은 걸 만들다가 필요해지면 알아서 배우게 되니까요. 한번 이 자리에 서면 누가 커리큘럼을 짜줄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이건 혼자보다 함께일 때 커집니다
여기까지가 '나'의 이야기라면, 이 놀이는 함께할 때 비교할 수 없이 커집니다.
어릴 때 놀이터를 생각해보면 쉽습니다. "야, 우리 오늘 이거 하고 놀자, 규칙은 이렇게 하자." 마음 맞는 사람을 모으고, 규칙을 만들고, 같이 즐기는 것. 사람이 사람과 함께할 때 생기는 힘은 아무리 좋은 AI도 대신해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함께하는 데에도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각자가 자기 것을 가지고 와야 한다는 것.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는 사람은, 남이 그린 그림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누군가 좋은 것을 함께 만들자고 손을 내밀어도 그게 그냥 해야 할 일로 들립니다. 알아들을 언어가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내 것을 만들어본 사람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볼 때 비로소 같이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무엇에서 시작하고 있나요
무언가를 배우려고 마음먹을 때 한 번쯤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이거,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가. 아니면 안 하면 뒤처질 것 같아서 하는 건가.
답이 후자여도 괜찮습니다. 저도 오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만 그동안 아무리 애를 써도 잘 남지 않았다면, 그게 내가 부족해서는 아니었다는 것만 알면 좋겠습니다.
시작점을 바꾸는 데 거창한 꿈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이건 좀 만들어보고 싶은데" 정도면 충분합니다. 사소해 보이는 그거 하나를 진짜로 만들어보면, 만드는 동안 배우게 되고, 배운 게 남고, 남은 것이 다음 걸 만들게 합니다. 두려움이 시켜서 도는 사이클과는 방향이 반대입니다. 돌수록 지치는 게 아니라 돌수록 자랍니다.
당신은 무엇을 만들어보고 싶으신가요.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것을 들고 사람들 앞에 서면, 혼자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큰 게 시작됩니다.
남의 꿈을 위해 자기를 갈아 넣을 사람은 없지만, 각자의 꿈을 들고 온 사람들은 함께 훨씬 큰 걸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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